트럼프, 중간선거 앞두고 러시아 에너지 제재 유예 결정

트럼프, 중간선거 앞두고 대러 에너지 제재 유예…경유값 잡기 나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1월 3일 중간선거를 앞두고 지난달 자신이 서명한 대러시아 제재법의 시행을 유예했다. 사상 최고치에 육박한 미국 내 경유(디젤) 가격을 끌어내리기 위해 러시아산 경유 공급을 늘리려는 조치다.
트럼프 대통령은 16일(현지시간) 늦게 이른바 ‘그레이엄법’의 러시아 관련 핵심 조항 적용을 모두 유예하는 행정명령을 내놨다. 법에 따른 관세와 제재 시행 시한인 18일을 이틀 앞둔 시점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행정명령에서 “그레이엄법에 규정된 제재와 제한, 관세의 적용을 유예한다”고 밝혔다.
그는 이번 유예가 “현시점에서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는 인증서를 의회에 제출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밝히지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 제재를 유예한 것은 2주 사이 두 번째다.
러 원유 5대 구매국에 100%, 러시아산 에너지에 500% 관세
정식 명칭이 ‘2026년 린지 O. 그레이엄 러시아·이란 제재법’인 이 법은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달 18일 서명했다. 법은 서명 후 30일 안에 시행하도록 규정했다. 러시아산 원유와 천연가스를 계속 사들이는 5대 구매국과 러시아의 원유 제재 회피를 돕는 5개국에서 들어오는 모든 상품에 최대 100%의 관세를 매기도록 했다. 미국으로 수입되는 러시아산 석유·가스 등 에너지 제품에는 최대 500%의 관세를 부과하도록 규정했다. 5대 구매국 명단은 미국 무역대표부(USTR)가 180일마다 다시 산정한다.
러시아 국영 은행과 거래하는 외국 은행과 제재 회피에 쓰이는 금융 메시징 서비스에 대한 제재, 러시아 국채 매입과 미국인의 대러 투자 금지 조항도 포함됐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이는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적대 행위를 멈추면 제재를 해제할 수 있도록 한 조항도 있다.
이번 유예는 이들 조항 전반에 적용된다. 조항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적용을 미루는 방식이어서 나중에 다시 시행할 수 있다. 유예는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이 관계 부처와 협의해 추가 조치가 필요하다고 판단할 때까지 이어진다. 기존 행정명령으로 이미 부과된 제재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 법안은 지난해 4월 그레이엄 의원과 리처드 블루먼솔 민주당 상원의원이 초당적으로 발의한 대러 제재 법안을 바탕으로 했으며, 상원에서 찬성 86표, 반대 11표로 통과됐다. 법안 처리를 주도한 그레이엄 의원은 지난 7월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법에는 그의 이름이 붙었다. 대러 제재 관련 조항은 2031년까지 효력을 갖는다.
푸틴과 손잡고 러시아산 경유 시장에 풀어
이번 결정은 트럼프 대통령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협력해 러시아산 경유의 글로벌 시장 공급을 늘리려는 과정에서 나왔다. 국제유가 급등으로 연료비 부담이 커진 상황이다. 16일 서부텍사스산원유(WTI) 선물은 배럴당 101.41달러, 브렌트유 선물은 109.86달러로 마감했다.
미국 경유 평균 가격은 지난달 3일 가스버디 집계 기준 갤런당 5.82달러를 기록해 2022년 6월의 종전 최고치(5.819달러)를 넘어섰다. 같은 시기 노동절 연휴 휘발유 평균 가격도 갤런당 4.03달러로 명목 기준 역대 최고치가 예상됐다.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푸틴 대통령과 함께 러시아산 경유를 글로벌 시장에 풀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이에 맞춰 미국 재무부 해외자산통제실(OFAC)은 지난주 러시아산 경유의 판매와 운송, 미국 내 수입을 내년 4월까지 허용하는 일반 허가를 발급했다. 합의에 따라 러시아는 수십만 톤 규모의 경유를 미국과 글로벌 시장에 공급하게 된다. 그레이엄법이 그대로 시행되면 경유를 비롯한 러시아산 석유제품에 관세가 붙고, 이를 실어 나르는 선박도 제재 대상이 된다.
관세 유예로 러시아산 에너지의 주요 구매국인 중국과 인도, 튀르키예와의 즉각적인 충돌도 피하게 됐다. 테일러 로저스 백악관 대변인은 17일 성명에서 “이 법은 대통령에게 평화적 해결을 추진할 추가 권한을 준다”고 밝혔다. 러시아 국부펀드인 러시아직접투자기금(RDIF)을 이끄는 키릴 드미트리예프 대통령 특사는 이번 결정을 “진정으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평가하며, 양국 간 경제 협력이 두 나라 모두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러시아만 돕는 결정”…의회서도 초당적 반발
우크라이나는 즉각 반발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X에 올린 글에서 “이 결정은 분명히 러시아만 돕는다”며 “이것으로 전쟁이 멈추지는 않는다”고 비판했다. 그는 법안을 통과시킨 민주·공화 양당 의원들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레이엄 의원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올렸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간밤에 우크라이나 에너지 시설을 겨냥해 최대 규모의 공습을 벌여 핵심 발전·송전 시설 15곳을 타격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부에 따르면 러시아는 탄도·순항미사일과 함께 샤헤드형 드론 332대를 동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제재 압박을 늦추면 푸틴 대통령이 공격을 이어가도록 부추기게 된다고 주장했다.
미 의회에서도 여야를 가리지 않고 비판이 쏟아졌다. 척 슈머 민주당 상원 원내대표는 트럼프 대통령이 “푸틴에게 올해 받을 최고의 생일 선물을 줬다”고 꼬집었다. 푸틴 대통령의 생일은 이달 7일이었다. 톰 틸리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고 비판했고, 존 코닌 공화당 상원의원은 그레이엄 의원이 살아 있었다면 “경악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틸리스, 코닌 의원과 미치 매코널, 수전 콜린스 공화당 상원의원은 지난 13일 트럼프 대통령에게 러시아산 경유 거래를 철회하고 제재법을 시행하라고 촉구했다. 반면 하원 표결 당시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공화당 의원 7명 가운데 한 명인 토머스 매시 하원의원은 트럼프 대통령이 의회가 부여한 권한으로 “거의 모든 조항”을 유예한 것을 반긴다고 밝혔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공방도 다시 격해지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16일 우크라이나 군수산업 시설과 물류 거점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계속하겠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에너지 휴전’이 즉시 발효됐다고 발표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가 곧바로 합의를 어겼다고 반박해 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에너지 휴전 이후 멈췄던 러시아 정유시설 공격을 재개하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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