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경기 둔화에 주택공적금 규제 완화…소비·주택시장 부양

중국 주택공적금 활용 범위 대폭 확대
중국 정부가 경기 둔화와 장기화하는 부동산 침체에 대응해 10조9,000억위안 규모의 주택공적금 활용 범위를 크게 넓힌다. 그동안 주택 구입과 주택담보대출 상환에 집중됐던 자금을 리모델링과 임대료, 주택 관리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 가계의 주거 관련 지출 부담을 낮추고 소비를 자극하겠다는 구상이다.
리창 중국 국무원 총리는 주택공적금 관리조례 개정안을 공포했으며 새로운 규정은 9월 20일부터 시행된다. 개정안은 주택공적금을 인출할 수 있는 상황을 확대하고 대출금리 결정 방식과 기금 운용 범위도 함께 손질했다.
이번 조치는 7월 중국의 소비와 산업생산, 투자가 동시에 약해진 직후 나온 부동산과 내수 지원책이라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7월 소매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0.6% 증가하는 데 그쳤고 산업생산 증가율도 4.5%로 6월의 5.3%보다 둔화했다. 1월부터 7월까지 고정자산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6.7% 감소했다.
10조9,000억위안 규모의 주택자금 활용
주택공적금은 중국의 근로자와 사용자가 매달 일정 금액을 적립하고 가입자가 주택을 구입하거나 주거비를 부담할 때 활용하는 제도다. 싱가포르의 공적 적립금 제도를 참고해 약 30년 전 도입됐으며 중국의 대표적인 정책성 주택금융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2024년 기준 주택공적금 잔액은 약 10조9,000억위안으로 집계됐다. 약 1조6,000억달러에 해당하는 규모다. 근로자와 사업주를 포함한 약 1억8,000만명이 제도에 참여하고 있으며 공적금을 통해 공급된 주택대출 잔액도 약 8조1,000억위안에 달했다.
그동안 문제는 막대한 자금 규모에 비해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상대적으로 제한적이었다는 점이다. 지역별 차이는 있지만 주택 구입과 대출 상환을 중심으로 제도가 운영되면서 집을 새로 사지 않는 가입자는 자신이 적립한 자금을 활용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중국 부동산시장이 신규 주택 건설 중심에서 기존 주택의 관리와 개선, 임대시장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주택공적금 제도 역시 주택 구입 지원만으로는 현재 시장 상황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이 커졌다.
리모델링과 주택 관리비에도 사용할 수 있어
개정된 제도에서는 가입자가 자신이 거주하는 주택을 리모델링할 때 주택공적금을 인출할 수 있다. 주택 관리비를 납부하는 경우도 새롭게 인출 대상에 포함된다. 국무원이 승인하는 다른 주거 관련 소비에도 사용할 수 있도록 추가적인 적용 가능성도 열어놨다.
중국 정부가 리모델링을 명시적으로 포함한 것은 부동산 정책의 초점이 신규 주택 판매뿐 아니라 기존 주택의 소비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가 있다.
주택을 새로 구입하지 않아도 인테리어와 설비 교체, 노후 주택 개선 등에 적립금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 건축자재와 가구, 가전제품 등 주택과 연결된 소비로 자금이 이동할 수 있다.
부동산 거래 한 건이 발생할 때는 주택 가격만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입주 이후 가구와 가전, 인테리어, 수리, 관리서비스 등 여러 분야에서 소비가 발생한다. 중국 정부가 주택공적금을 소비 부양 정책으로 활용하려는 이유도 이러한 연관 산업 효과에 있다.
월세 인출 문턱도 낮춰
임차 가구의 공적금 이용도 쉬워진다. 기존에는 주택공적금을 월세 지급에 사용하려면 임대료가 가구 임금소득에서 일정 비율을 넘어야 하는 등의 조건이 적용될 수 있었다.
새 규정에서는 월세 지급을 위해 주택공적금을 인출할 때 임대료가 가구소득의 일정 비율을 넘어야 한다는 조건을 폐지한다. 주택을 보유하지 않은 가구가 적립금을 실제 주거비에 보다 직접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주택을 반드시 구입해야 제도의 혜택을 크게 받을 수 있었던 기존 구조를 임대와 보유, 관리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하는 변화다. 최근 중국 젊은층의 주택 구매 부담이 커지고 장기간 임대주택에 거주하는 인구가 증가한 상황도 제도 개편의 배경으로 볼 수 있다.
공적금 주택대출 금리 추가 인하 가능성 열려
대출금리 결정 구조도 바뀐다. 개정 조례는 주택공적금의 예금과 대출금리를 국무원이 결정하도록 규정했다. 기존에는 중국 인민은행이 공적금 대출금리 변경안을 제안하고 국무원의 승인을 받는 구조가 명시돼 있었지만 앞으로는 국무원이 직접 결정할 수 있다.
시장에서는 이를 향후 주택공적금 대출금리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으로 보고 있다.
현재 주택공적금을 이용한 주택대출 금리는 일반 은행의 기준 주택담보대출 금리보다 약 0.9%포인트 낮다. 이미 상대적으로 저렴한 자금이지만 정부가 추가 인하에 나설 경우 기존 대출자와 신규 주택 구매자의 이자 부담을 더 낮출 수 있다.
중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주택을 구입할 때 공적금 대출과 시중은행 대출을 함께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공적금에서 받을 수 있는 금액에는 한도가 있기 때문에 부족한 부분을 일반 주택담보대출로 충당하는 방식이다.
공적금 대출금리가 더 낮아지거나 대출 한도가 확대되면 가계의 전체 주택금융 비용을 낮추는 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올해만 해도 80개가 넘는 지방정부가 주택공적금을 이용할 수 있는 대출 한도를 높인 것으로 집계됐다.
공적금으로 정책은행 채권도 처음 매입
주택공적금 자체의 운용 방식에도 변화가 생긴다. 중국 정부는 공적금 관리센터가 기존 국채뿐 아니라 정책성 금융채권을 매입할 수 있도록 투자 대상을 확대했다. 주택공적금이 정책은행 채권에 투자할 수 있도록 중앙정부 차원에서 명시한 것은 이번 개편의 중요한 변화 가운데 하나다.
정책성 금융채는 중국개발은행과 같은 정책금융기관이 국가의 산업과 인프라 정책 등을 지원하기 위해 발행하는 채권이다. 일반적으로 국채보다 수익률이 높으면서도 중국 금융시장에서 신용도가 높은 자산으로 평가된다.
공적금 운용기관 입장에서는 투자 대상을 넓혀 장기간 쌓여 있는 자금의 운용수익률을 높일 수 있다. 이번 정책 발표 직후 중국개발은행 10년 만기 채권 수익률이 두 달 만에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하는 등 정책은행 채권시장에서도 매수 수요 확대 기대가 반영됐다.
주택 구매자뿐 아니라 임차인까지 지원 범위 확대
이번 개편은 주택공적금 제도의 성격을 주택 구입 금융에서 전반적인 주거 소비 지원 제도로 넓히는 변화로 볼 수 있다.
기존에는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근로자가 주택을 구입할 때 저금리 대출을 받는 것이 가장 대표적인 혜택이었다. 앞으로는 주택을 새로 사지 않더라도 월세와 리모델링, 주택 관리 등에 자금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개정안은 자영업자와 시간제 근로자를 포함한 일부 유연고용 종사자도 자발적으로 주택공적금에 가입할 수 있도록 제도를 확대했다. 가입자 범위를 기존 정규직 중심에서 더 넓은 고용 형태로 확대하려는 방향이다.
공적금 인출 절차도 간소화된다. 인출 신청은 관리센터가 접수한 날부터 3일 이내에 결정하도록 하고 주택대출 신청 심사 역시 10일 이내에 처리하도록 기준을 명확히 했다. 지역을 옮기더라도 가입 기록을 보다 쉽게 인정하고 다른 지역에서 대출을 이용할 수 있도록 전국 단위의 기록 연계도 강화한다.
부동산 침체와 소비 둔화가 정책 변화 압박
중국 정부가 지금 주택공적금 개편에 나선 배경에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는 부동산시장이 있다. 중국 부동산 경기는 2021년 이후 장기 조정을 겪고 있으며 개발업체의 유동성 문제와 주택가격 하락이 가계의 소비심리까지 압박하고 있다.
7월 중국 신규 주택가격은 전월 대비 0.1% 하락했고 전년 동월 대비로는 3.2% 떨어졌다. 조사 대상 70개 주요 도시 가운데 전월 대비 주택가격이 상승한 곳은 17개에 불과했다. 부동산 판매와 투자, 신규 착공 역시 약한 흐름을 이어갔다.
부동산 침체는 중국 경제에서 단순히 건설업의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중국 가계 자산에서 주택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기 때문에 주택가격이 하락하면 소비자들이 자산이 줄었다고 느끼면서 지출을 줄이는 자산효과가 나타날 수 있다.
7월 소매판매 증가율이 0.6%까지 둔화한 것도 내수 부진에 대한 정책 당국의 부담을 높였다. 제조업과 수출만으로 경제성장을 유지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중국 정부는 가계가 이미 적립한 주택공적금을 실제 소비로 더 쉽게 전환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대규모 경기부양보다 기존 자금 활용에 초점
이번 정책의 특징은 정부가 새로운 재정을 대규모로 투입하는 방식이 아니라 기존에 쌓여 있는 10조9,000억위안 규모의 주택공적금을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한다는 점이다.
공적금은 근로자와 기업이 이미 적립한 자금이기 때문에 중앙정부가 새로운 재정적자를 크게 늘리지 않고도 가계의 주거 관련 소비와 주택금융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
이는 최근 중국이 선택하고 있는 경기부양 방식과도 연결된다. 경제지표가 부진하지만 중국 인민은행은 대규모 기준금리 인하보다 재정 집행과 특정 분야에 집중된 지원책을 우선하는 모습이다. 시장에서도 8월 대출우대금리가 기존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을 높게 보고 있다.
전면적인 부동산 부양책보다 주택 구매와 임대, 리모델링 비용을 낮춰 실제 가계의 부담을 단계적으로 줄이는 방식에 가까운 셈이다.
주택시장에는 다소 긍정적이지만 효과는 제한될 가능성
중국 부동산 시장 분석기관들은 이번 개편이 주택시장에 다소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공적금 사용 범위가 넓어지고 대출금리를 보다 유연하게 조정할 수 있게 되면서 실수요자의 주택 비용을 낮추는 효과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리모델링과 관리비에 사용할 수 있게 된 점은 신규 주택 판매가 크게 늘지 않더라도 기존 주택을 중심으로 관련 소비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중국 부동산시장이 신규 개발 중심에서 기존 주택을 관리하고 개선하는 단계로 이동하는 흐름에도 맞는다.
다만 주택공적금 규제 완화만으로 중국 부동산 시장 전체가 빠르게 회복될 가능성은 제한적이다. 주택가격이 계속 하락할 것이라는 기대가 남아 있으면 대출금리가 낮아져도 가계가 주택 구입을 미룰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현재 문제는 대출을 받을 수 있는지가 아니라 가계가 앞으로 주택가격과 소득이 안정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는지와도 연결돼 있다. 따라서 주택공적금 활용 확대는 주택 수요를 직접 폭발적으로 끌어올리는 대규모 부양책보다 가계의 현금흐름을 개선하고 침체된 주거 관련 소비를 조금씩 살리는 정책에 가깝다.
주택 구입에서 주거 전체를 지원하는 제도로 변화
이번 개편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중국 정부가 주택공적금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집을 구입하도록 저금리 대출을 제공하는 것이 제도의 중심이었다면 앞으로는 임대와 구입, 리모델링, 관리까지 전체 주거 과정에서 활용하는 자금으로 확대된다.
신규 주택 공급이 경제성장을 끌어올리던 시기에는 주택 구매 지원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중국의 도시화 속도가 둔화되고 기존 주택 재고가 커진 현재는 이미 존재하는 주택에서 새로운 소비를 만들어내는 것이 더 중요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가 정책은행 채권 투자까지 허용한 것도 단순한 부동산 규제 완화보다 장기적으로 주택공적금 제도를 다시 설계하려는 움직임으로 볼 수 있다. 가입자의 자금을 보다 효율적으로 운용하면서 동시에 실제 생활에서 사용할 수 있는 범위를 넓히는 두 가지 방향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기 때문이다.
9월 20일부터 새로운 규정이 시행되면 지방정부들이 구체적인 인출 기준과 대출 한도, 금리 정책을 어떻게 조정하는지가 다음 변수다. 특히 국무원이 공적금 대출금리를 추가로 낮출지와 주요 도시가 리모델링과 임대료 인출 한도를 어느 수준까지 확대할지가 실제 소비와 주택시장에 미치는 효과를 결정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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