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조건 충족 전까지 미국과 대화 없다”

호르무즈 해협서 유조선 폭발 이란은 기뢰 충돌 주장
호르무즈 해협에서 유조선 한 척이 폭발해 화재가 발생한 가운데 이란 혁명수비대가 해당 선박이 해상 기뢰와 충돌했다고 주장했다. 미국과 이란의 군사적 충돌로 이미 크게 위축된 해협의 상업용 선박 운항에 또 다른 악재가 발생한 데다, 이란은 미국과의 협상 가능성에도 선을 그으면서 긴장이 다시 높아지고 있다.
이란 파르스통신은 혁명수비대를 인용해 파나마 국적 원유 유조선 엘 가이아가 호르무즈 해협 남쪽 항로를 지나던 중 기뢰와 충돌해 폭발한 뒤 선박 전체에 불이 번졌다고 보도했다. 혁명수비대는 해당 선박이 이란이 통행을 제한한 구역을 지나던 중 사고가 발생했다고 주장했다.
혁명수비대는 이번 사건을 언급하면서 호르무즈 해협이 여전히 폐쇄된 상태이며 이란의 통제 아래 있다고 재차 밝혔다. 다만 사고가 정확히 언제 발생했는지와 기뢰가 설치된 시점, 선박이 당시 어떤 화물을 싣고 있었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하지 않았다.
미 중부사령부는 이란 측 발표와 다른 설명을 내놨다. 미군은 엘 가이아가 지난달 이란의 미사일 공격을 받아 이미 운항 불능 상태가 됐으며, 최근 오만 인근 해상에서 이란 드론의 추가 공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현재 해당 선박이 역내 파트너에 의해 예인되고 있다고 밝혔다.
국제해사기구는 엘 가이아가 지난 12일 피해를 입었다고 보고했지만 정확한 원인은 밝히지 않았다. 당시 승조원 2명이 실종된 것으로 파악됐다. 선박 소유사 측의 구체적인 설명은 즉시 확인되지 않았다.
호르무즈 통항량 하루 4척까지 감소
유조선 사고는 호르무즈 해협의 선박 운항이 다시 급격하게 줄어드는 가운데 발생했다. 선박 추적업체 Kpler의 잠정 자료에 따르면 14일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 원자재 운반선은 4척에 그쳐 하루 전 10척보다 크게 감소했다.
이 가운데 벌크선 2척이 해협 밖으로 빠져나갔고 유조선 2척이 빈 상태로 해협 안으로 들어갔다. 공격을 피하기 위해 자동식별장치를 끄고 운항하는 선박도 있어 실제 통항량은 집계보다 많을 수 있지만, 전쟁 이전과 비교하면 해상 운송이 크게 위축된 상태다.
미국과 이란의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는 하루 평균 약 125척의 대형 상선이 호르무즈 해협을 이용했다. 원유와 액화천연가스, 벌크 화물, 컨테이너선 등이 이 항로를 오갔으며 세계 원유와 LNG 공급의 약 20%가 이 해협을 통과했다.
최근에는 이란과 미국 양측이 유조선과 군함을 잇따라 공격하면서 선사들이 통항을 줄이고 있다. 미국은 일부 시간대에 상선을 대상으로 군사적 보호를 제공하고 있지만 이란은 자국이 승인하지 않은 선박의 통항을 제한하겠다는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트럼프 대화 가능성 언급했지만 이란은 즉각 거부
해상 긴장이 계속되는 가운데 미국과 이란의 외교 메시지도 다시 엇갈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란이 미국과의 합의를 빠르고 절박하게 원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미국도 협상 자체의 가능성에는 열려 있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실제 협상에 참여할지는 자신이 결정할 것이라며 즉각적인 협상 개시를 확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최근까지 이란과의 협상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보였지만 이번에는 대화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언급했다.
그러나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의 모센 레자에이 사무총장은 미국 측의 메시지가 일관되지 않는다며 이란의 조건이 충족되기 전에는 협상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레자에이는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 거부와 대화 가능성을 오가는 상반된 신호를 보내고 있다고 지적하면서 “원유와 해협을 둘러싼 판도는 달라졌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발생할 상황을 사후 수습하는 방식으로는 막을 수 없다며 이란이 제시한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미국과의 협상은 없다고 강조했다.
이란은 항만 봉쇄 해제와 제재 완화 요구
레자에이는 이번 발언에서 구체적인 협상 조건을 다시 열거하지 않았지만 이란은 최근 미국과의 대화 재개 및 호르무즈 해협 정상화를 위한 조건을 여러 차례 제시해왔다.
이란이 앞서 제시한 요구에는 미국의 이란 항만 봉쇄 종료와 경제제재 완화, 전쟁으로 발생한 피해에 대한 보상 등이 포함돼 있다. 이란은 이러한 조건이 충족될 경우 호르무즈 해협에 지정 항로를 운영하는 방안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혀왔다.
미국은 호르무즈 해협이 국제 상선에 개방된 수로로 유지돼야 한다는 입장인 반면, 이란은 자국의 승인을 받은 선박만 지정된 항로를 이용하도록 하고 통항에 대한 관리 권한을 확보하려 하고 있다.
오만은 양측의 입장 차이를 좁히기 위해 이란과 걸프 국가들이 참여하는 회의를 추진했지만 예정됐던 회의는 최근 연기됐다. 이란은 연기가 사우디아라비아 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으며 새 회의 일정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해협 사고와 협상 교착 동시에 이어져
호르무즈 해협을 둘러싼 긴장은 최근 중동의 다른 주요 에너지 수송로까지 확산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공격을 받은 뒤 호르무즈 해협을 우회하는 핵심 수송시설인 동서 송유관의 가동을 중단했고, 예멘 후티 반군은 홍해 연안과 바브엘만데브 해협 주변에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제 원유시장에서는 호르무즈와 홍해를 연결하는 주요 공급 경로가 동시에 흔들릴 가능성이 반영되고 있다. 사우디 동서 송유관 가동 중단 이후 브렌트유는 배럴당 100달러를 크게 웃도는 수준을 유지하고 있으며 미국 내 디젤 가격도 사상 최고 수준까지 상승했다.
이번 엘 가이아 사고의 원인을 두고 이란 혁명수비대는 기뢰 충돌을 주장한 반면 미국 중부사령부는 이란의 미사일과 드론 공격에 따른 피해라고 주장하고 있다. 국제해사기구는 선박이 피해를 입고 승조원 2명이 실종됐다는 사실을 확인했지만 공격 또는 사고 원인에 대해서는 별도의 결론을 내리지 않았다.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대화 가능성을 열어둔 직후 이란 최고국가안보회의는 자국의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협상은 없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호르무즈 해협 통항량이 전쟁 이전보다 크게 줄어든 상황에서 유조선 사고까지 추가되면서 해상 운송 정상화와 미국·이란 간 협상 재개의 시점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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